최근 GS25의 포스터를 두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말이 많습니다. 남성에 대한 비하의 의도가 담긴 표식이 포스터에 담겼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젠더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성을 혐오하는 집단의 표식(?)이 대기업의 홍보물에 게재됐다니 작은 일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남성이 주류를 이루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GS그룹 전체에 대한 불매를 한다는 글이 수시로 올라오는가 하면 이제 유명한 방송 토론프로그램인 100분토론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사실 젠더갈등은 최근 수년간 한국 사회의 주요한 균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운동으로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진 만큼 남성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도 커져가고 있습니다. 남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것을 상징으로 내세우는 커뮤니티가 등장하는가하면 아예 남자라면 아기들이라도 벌레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람이길 포기한 자들은 무엇을 먹고 그렇게 커져갔을까요? 전 정치권의 주축이 된 86세대, 성찰하는 법을 잊은 여성주의 활동가 그룹이 그들의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정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과정'으로 정의했습니다. 사회내의 가치있는 것들을 분배하는 과정이 단순한 기계적인 배분이나 시장논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권한(권위)를 위임받은 자들에 의해 나눠지도록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권위를 위임받은 자들이 '합리적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정치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젠더갈등이라는 영역에서만큼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최근에 권위적으로 배분된 자원을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인 보배드림에 게시된 사진입니다. 사진을 보면 출입구에 가장 가까운 곳에 여성배려주차공간이 있고, 그보다 불편한 장소에 장애인 주차구역이 위치한 것이 보입니다. 이 사진만 놓고보면 여성은 장애인보다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과연 장애인보다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할까요? 이런 헤프닝은 정부 또는 지방정부의 정책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주차구역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부의 공모사업에서 주민등록번호가 2나 4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장애인보다 더 많은 가산점이 부여되기도 합니다. 이쯤되면 한국의 '정치'는 여성들을 특혜가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고 인식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평생동안 남자로서 누린 혜택(?)이라고는 병역의 의무 밖에 없다고 느끼는 지금의 20대 남성이 본다면 지금과 같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은 과연 공정할까요?
사실 이런 문제는 지금 정치권의 주축이 된 사람들의 구성과 20대 남성의 시차에서 비롯됩니다. 지금은 2021년이고, 이제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도 유권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정치권의 주축은 86세대입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들. 이들과는 40년 가량의 시차가 존재합니다. 개도국이 아니라 제3세계에 속하는 저개발국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들과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들이 태어날때부터 같은 시각을 같기는 어려운 것이죠.
86세대 남성은 자신들의 대학진학을 위해 학업을 포기한 누나 혹은 여동생을 떠올리며 여성들의 차별을 공감할 겁니다. 당시에 매우 흔한 일이었을테니까요. 하지만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도 그런 느낌일까요? 이런 시각차이는 사회의 갈등을 봉합하고 단합을 도모해나가야할 '정치'가 사회를 오히려 사회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정치'를 한다는 이들이 '사회에서 여성은 차별받고 있으며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시각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으니 생기는 일이죠.
대한민국 헌법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도록 하고 있으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정부 혹은 국회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법령을 보면 정부와 국회는 헌법 11조2항을 아예 무시하기로 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적극적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제도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순한 우대조치뿐만이 아닙니다. 미투운동이 확산되자 정부는 법률이 아닌 행정조치의 일환으로 성범죄를 신고한 사람에 대한 무고죄 수사를 중단하도록 합니다. 무고죄가 성범죄 피해자를 공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사실 이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간 성범죄 가해자들의 클래식한 수법이 무고죄로 피해자를 압박하는 것이니까요. 지금의 '정치가'들이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라면 더욱 효과적이겠죠. 그런데 정부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정부정책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조치들은 항상 극단적인 반작용을 가져오기 마련일테니까요.
더욱 문제는 검찰이 무고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때 발생하는 수사상의 결함입니다. 성범죄로 형사고소를 한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움직이는 전문가 집단이 그를 대신해 싸워줍니다. 반면 피고소인은 자신이 돈과 시간을 들여 스스로를 방어해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에서 법원의 판결전까지 무고를 '검토'조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무고에 의한 피해자를 양산하라고 정부가 판을 깔아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거론해야하는 것은 성찰을 잊은 여성주의활동가 그룹입니다.
최근 유명 유튜버 보겸씨가 윤지선 이라는 여성주의 학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매도를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언뜻보기에 곤충학으로 보이는 논문이 철학분야의 등재학술지에 게재됐고, 그 논문에서는 보겸씨가 만든 유행어인 '보이루'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보겸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등재학술지가 인정한 여성혐오론자가 됐습니다. 하나의 헤프닝이라고 하기에 보겸씨가 겪을 고통이 가볍지 않다고 보입니다.
더욱 문제는 논문의 내용입니다. 남자 아이들을 '벌레(한남유충)'에 비유합니다. 이게 대한민국의 등재학술지에 게재됐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망각하는 것이 등재학술지의 덕목이었던가요? 학술지 얘기는 차치하고, 여성주의 활동가그룹 중 어느 누구도 윤지선 교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기사화는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대학생 활동가 그룹은 윤지선 교수에 대한 공격(?)이 여성혐오적 폭력문화라고 규정합니다.
정당한 비판조차도 '공격'이 되고 여성주의 활동가들의 비논리적인 주장들을 비판하면 '백래시' 즈음으로 치부합니다. 여성주의가 하나의 '이즘'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조차 망각한 자들을 스스로 비판하고 쳐내야합니다. 사회에 혐오를 퍼뜨리는 자들에 대한 침묵 내지 동조는 혐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 중에 100도씨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거기서 학생회장은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의 열 걸음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한 걸음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보다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활동가 그룹의 성찰이 선행돼야 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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